1️⃣ 들어가며
작년 11월에 SI회사에서 퇴사하고 올해 10월에 겨우겨우 이직에 성공했다. 지원중에는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렇게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초반 3개월은 이직을 두려워했고, 중반에는 중요한 순간 잘못된 선택을 내렸으며, 후반 3개월은 지쳐서 기계적으로 지원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잠시 멈춰 그동안의 일들을 정리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려 한다.
2️⃣ 자신을 증명하지 못한 디자이너
7개월간 약 150개의 회사에 지원, 그중 30곳에서 면접을 봤고 5곳에 합격하였다. 여러 가지 타이밍과 여건이 맞지 않아서 앞의 4 회사는 가지 못했다. 정말 많이 지원했다. 일단은 내가 원하던 회사에 가지 못한 이유와 따라서 앞으로 해야 할 행동만 써보려 한다.
나를 뽑아야 할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내가 내세운 강점들은 다음과 같은데, 제대로된 근거를 대지 못했다.
UX에 관심 있어요. 인문계 전공이라 이쪽에 강점 있고요, 블로그에도 글 많이 썼습니다.
UX하면 리서치인데 실제 사용자를 대상으로 한 검증 프로젝트가 없었으며,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그걸 증명하려던 근거가 이 블로그였는데, 퇴사 이후 뜸해졌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고, 면접관 입장에서는 “언제든 다른 분야로 갈 수 있는 사람”으로 비치기 쉬웠을 것 같다.
피그마 잘씁니다.
이 점은 "어필"할 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놓쳤다. 툴 스킬은 디자이너에게 필수적 역량이지 자랑할 요소가 아니다. 정말 자랑하고 싶다면, 피그마로 여기까지 할 수 있어요!라고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프로젝트 경험을 기반으로 협업 가능합니다.
분명히 협업 경험들이 있었고 그 점을 살릴 수 있었지만 면접 시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좀 더 프로젝트 하나하나를 할 때 고민하고 소통한 흔적을 보여줘야 했고, 그걸 에피소드들로 엮어서 준비해놨어야 했다.
3️⃣ 그래도 했다!
그럼에도 합격한 회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합격 사유는 다음과 같다.
꾸준한 지원
가장 중요하다. 나같이 뾰족하게 장점이 드러나지 않는 디자이너는 어디든 지원해야 기업이 날 봐주기라도 한다. 합격하지 않더라도 어디든 지원하는 루틴이 생기면, 탈락하더라도 별로 타격을 입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식의 멘탈 관리가 나에겐 가장 중요했다.
책 읽기와 운동하기
오랜 이직 기간을 유지할 수 있었던 대표적인 이유다. 내가 마음 둘 수 있는 취미를 유지한 것. 올해 59권의 책을 읽었는데, 한 달에 5-6권 읽은 셈이고 그중에 벽돌책도 있으니 이때가 아니면 하기 힘들다.
그리고 작년 10월 즈음부터 시작한 헬스도 주 3회 이상 꾸준히 다니고 있다. 덕분에 체력이 늘고 몸도 가벼워져서 무언가 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실행력이 높아졌다. 마인드셋도 바뀌었는지 먼 곳에서 본 면접에서 탈락하더라도 "평소였으면 안 갔을 곳까지 가보고 경치 구경했다. 걷기 운동도 하고 광합성도 했다"정도로 생각하고 넘길 수 있었다.
나름대로 나만의 강점을 찾고 어필
제대로 된 근거를 들지 못했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노력했다. 실무 포트폴리오는 공개가능한 프로젝트들로 잘 정리했고, 각각의 프로젝트들을 잘 설명하려고 노력했고, 무엇을 만들어냈는가 보다 어떻게 왜 만들었는가를 설명하려 했다. 무엇보다 비전공 계열 출신임에도 디자이너가 되려는 사유를 나름대로 설명했다.
4️⃣ 다음엔 더 잘하길
내 문제에 집중하다 보니 기업이 채용과정에서 겪을 문제는 고려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원하는 회사에 가고 싶다는 마음에 나와 어울리지 않는 포장지에 나를 포장하고 최대한 좋게 보이려 했다. 그러면서 내 강점이 무엇인지를 지원프로세스 도중에 잊어버렸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면접관들 입장에서는 다 보였을 거다.
내 강점은 심사숙고, 회고, 복구, 지적 사고다. 이 강점들을 살리려 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강점들 - 사람들과 소통하기 좋아하고, 활발하며, 선천적으로 감각 있는- 을 따라가려고 해 버렸다. 그러면 안 된다.
지금은 내 강점을 살릴 수 있는 관련 디자인 스킬들을 고민하고 있다. 일단은 디자인 이론이나 리서치 방법론 공부, 인지적 역량, 마인드셋 키우기, 테크니컬 스킬 키우기 정도라 생각한다.
5️⃣ 나가며
어떤 결정이든 내려야 하는 시기에 합격했고, 선택했으며, 만족한다. 피그마 내부 텍스트 간 이동을 탭으로 할 수 있다는 걸 저번주에 알았다. 며칠 전에는 챗지피티를 사용해서 로렘입숨 대신 그럴듯한 텍스트를 생성해서 넣어봤는데 재밌었다. 회사가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과 소통한다. 이렇듯 어떤 회사든, 회사를 다니는 경험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100% 만족해서 다니는 건 아니지만 60%의 만족도 만족이다. 가능성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에 발 딛고 살아갈 것. 인간으로서 먼저 제대로 서있어야 디자이너로서도 서 있을 수 있다.